제목 : 낭중지추(囊中之錐)
글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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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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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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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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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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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22 오후 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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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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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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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囊中之錐)
모 대학의 남 교수는 외부강의를 제법 하는 편인데 내용이 시원치 않고 피드백도 별로라 시간이 갈수록 강의의뢰가 줄어들고 있다. 그는 늘 이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교육담당자에게 “자신의 탁월함, 교육내용의 우수함”을 선전하지만 씨알이 먹히는 것 같지는 않다. 강의 중에도 틈만 나면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콘텐츠는 엄청 많지만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 내용은 정말 필수적입니다. 모든 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지요. 하루 종일 해도 전달하기 어려운데 몇 시간 밖에 할당을 안 하니 제대로 효과가 나겠습니까?...” 라는 말을 수시로 한다. 한 마디로 이렇게 기가 막힌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당신들은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의를 듣다보면 별 내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늘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라는 말을 하면서 구체적인 설명을 뒤로 미루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강의가 끝나가도 그럴듯한 대목이 없는 것이다. 늘 그렇고 그런 내용만을 반복하다 강의는 끝난다.
한동안 김용옥 선생의 강의에 푹 빠졌었다. 무엇보다 무궁무진한 그의 콘텐츠에 압도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공자와 노자의 얘기를 청중의 눈높이에 맞춰 재밌게 전달하는 그의 강의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고전은 정말 흥미로운 것이구나, 그동안 나는 정말 무식했구나, 나도 고전을 배우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어려운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정말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방대한 고전을 쉽게 풀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고전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본 사람은 “쉽고 재밌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지식을 완벽하게 소화해야만 한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전문지식이란 없다. 다만 자신이 완전히 소화를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김용옥 선생을 존경한다. 여러 면에서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가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여, 보통 사람들의 고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준 공로를 부인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대기업 임원들이 미국 대학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을 때의 일이다. 가족과 떨어져 수십 년 만에 공부를 하려니 죽을 지경이다. 그것도 영어로 진행을 하니 영어에 서툰 임원들은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그래도 오전에는 견딜만한데 점심 후에는 죽음이다. 게다가 재미없기로 유명한 재무회계 시간이다. 강의가 시작된 후 30분 정도가 지나자 생존자가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던 미국인 교수가 마침내 성질을 내면서 한 학생을 가르쳤다. 유난히 심하게 조는 학생의 옆자리 학생이었다. “학생, 옆에 조는 학생 좀 깨우지 그래요.” 그 말을 듣고 학생이 대답했다. “재운 사람이 깨우십시오.” 그 말에 모든 학생들이 포복절도했고, 교수도 웃었다. 강의시간에 자는 것은 학생의 잘못이라기 보다, 재운 교수의 잘못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필요성을 느낄 때 스승은 나타난다.”는 격언처럼 배움의 일차적 책임은 배우는 사람에게 있다. 호기심을 갖고 무언가를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것도 사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할 것이냐 하는 것은 지식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늘 생각해야할 중요한 이슈이다.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르치는 사람의 내공이 탁월해야 하는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가르치는 사람의 내공이 높으면 그 사실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법이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강의를 열심히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자신의 내공 약함과 비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낭중지추(囊中之錐) 란 말을 좋아한다. 호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듯이 높은 내공은 감추고 싶어도 저절로 사람들이 알게 된다는 말이다.
글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겸
한국리더십센터
전문위원)